<작가의 말>

소설은 작가의 자화상이다.         

 

1

  나는 살아오면서 여러 체험을 겪었고, 그 중심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들 중 누군가의 이야기는 소설로 남기고 싶어 틈틈이 기록하고는 했다. 나름의 시각과 언어로 한 시대의 인간사를 해부하고, 내 삶도 성찰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보니 내 소설은 내가 만난 사람들이 소재고 또 주인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작중 인물의 원형은 내가 직접 만났던 그 누구다.  

  이 작품들을 쓰면서 나는 동화처럼 살았던 소년 시절을 돌이켜 보기 일쑤였다. 이제는 추억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고향 마을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그 시절 사람들과,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고는 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에게 고향은 어머니의 품속 같은 곳이었고, 추억과 감성의 요람이었다. ‘작가의 말’을 쓰면서도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안개이듯 밀려드는 향수에 젖어 들고는 했다. 

  왕복 오십 리 꼬부랑길을 뜀박질하던 국민학생 시절이 특히나 그리웠다. 이 지나온 세월에 대한 온고지정, 통 잊히지 않는 묵은 정이 나의 창작 욕구를 불붙인 동인이자 주제가 되었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밤손님(빨치산)에게 변을 당한 슬픈 가족사가 있다. 참변을 당한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때였고, 그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나는 이 사건을 망각 속에 묻어 버리기보다는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나의 소설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 책에 실린 몇 작품들이 그 한 결과물이다. 그게 2004년부터니까 꽤 오랜만에 첫 소설집이 나온 셈이다. 나머지 결과물은 시간이 허락해 준다면 머잖아 나올 것이다.   

 

  이 책에는 아홉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누이>는 유년기를 되돌아본 작품이다. 누이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낸 작품이어도 주된 모티프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 향수다.

 

  <먼 귀로>는 전쟁 통에 거덜이 난 신혼부부의 삶을 파고든 작품이다. 무대는 육이오 전후의 고향 마을이다. 전쟁소설이라기보다는 세태소설에 가까운 작품이다.

  신혼인 택만이는 남뱅이네 집 머슴이 되어 아내 도리실댁과 남뱅이네 문간방에 살림을 차린다. 남뱅이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었다.  

  육이오가 나자 택만이는 입대하고, 외로움에 사무친 도리실댁은 홀아비로 살고 있는 남뱅이에게 함락당한다. 도리실댁은 배가 불러오자 친정으로 가고, 적군 포로가 되었던 택만이는 귀환 소식을 보내온다. 택만이가 살아 있는 것을 알게 된 남뱅이는 자살한다. 

돌아온 택만이가 방문 앞에 서는데 아내의 비명에 섞여 갓난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내가 남뱅이의 아이를 낳는 순간이었다. 방문을 열려다 말고 돌아선 택만이는 입산해 승복을 입는다. 

  부조리한 현실에 실망한 택만이가 택한 대안은 구도자의 삶이었다.

  

  <궁합>은 처녀 총각의 결혼과 이별을 사주팔자와 연관지어 끌고 나간 향토소설이다. 1950년 전후의 농촌 마을이 무대다. 

주인공은 일본 순사와 한국 작부 사이에서 태어난 서출 반종 하루꼬다. 그녀는 해방 직후 고아가 된다. 국민학생 때였다. 예안 장터 국밥집 양녀로 들어간 그녀는 타고난 미모가 화근이 되어 안주인의 미움을 산다. 손님들뿐만 아니라 안주인 남편도 집적댄 탓이었다. 

  화가 난 안주인은 궁합도 보지 않고 하루꼬를 시집보낸다. 그녀는 머슴살이하는 덕배 아내가 된다. 덕배와 짝도 안 맞고, 주변 사람들의 냉대가 심해 하루꼬는 국민학생 때 알고 지내던 상기와 밀통한다. 

  상기는 공산 활동에 뛰어든 사내다. 육이오가 나자 인민위원회 간부가 된 그는 하루꼬를 빼앗아 간다. 전세가 바뀌어 인민군이 후퇴하자 상기와 하루꼬는 종적을 감추고, 덕배는 울분에 사무쳐 자원입대한다.  

  또 다른 주인공인 두하와 선자는 아버지와 딸 같은 나이 차이에도 결혼에 성공한다. 궁합이 좋다는 두하의 엉너리에 선자가 홀딱 넘어간 결과이다.    

  그 시절 풍속을 풍자적으로 그린 이 소설은 안동지방 특유의 사투리가 진하다.

 

  <씨> 역시 해방 전후의 농촌 마을 민속을 다룬 향토소설이다. 

  주인공 종구는 반비飯婢 몸에서 태어난 외아들 종손이다. 종구는 출생의 한을 못 이겨 탕아처럼 산다. 중학교도 중퇴하고,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조혼한 그는 본처를 고향에 버려두고 안동에서 주색잡기를 즐긴다. 첩을 셋이나 갈아치우면서다. 

  사업(탄광사업)은 망하고, 첩도 떠나가고, 아편 중독자가 된 그는 본처에게 돌아온다. 빚에 몰린 종구는 선대가 물려준 땅을 헐값으로 팔아 댄다. 종구가 내놓는 땅을 한풀이하듯 사들인 사람은 왕년의 종구네 머슴 강쇠다. 그는 종구네 집까지 탐낸다. 

  강쇠는 종구네 머슴이었을 때 종구 생모 분례를 집적대다가 쫓겨났다. 강쇠는 약장사도 하고, 일본 형사 앞잡이 노릇도 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호사는 누리지 못하고 분례를 뒤따라 급사한다. 

  종구는 종손이면서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는 어느 날 깨닫는다. 

  “그래, 죽기 전에 씨 하나 퍼뜨려 봐야겠어. 사내가 씨도 못 남기고 죽어서는 안 되지. 명색이 종손인데.”  

  병약한 종구는 어느 날 밤 아내 녹전댁을 끌어안고 죽기 살기로 한 톨 씨를 심는다. 그러고는 며칠 후 죽는다. 죽어 가는 종구 귓속 멀리서 아내 말이 꿈결인 듯 들려온다. 

  “보살이 카대요. 지가 아들을 뱄다고요.”         

  종구는 알아듣고 속으로 중얼댄다. 

  “나도 씨를 심었어. 부모님 원도 풀어 드렸어. 인제는 죽어도 한이 없어.”

  ‘연어는 죽기 전 알을 낳는다.’ 이 말이 이 소설의 모티프다.

 

  나는 스물 안팎의 한창 나이에 문경국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연작으로 쓴 <문경의 새벽>과 <그 여자>와 <겨울 숲>은 그때 겪은 일을 소설로 쓴 작품이다. 국민학교 양호 교사인 민애란 선생과 하숙집 처녀 정숙이를 상대로 벌인 서툰 연애 행각이 창작의 밑거름이 되었다.  

 

  <문경의 새벽>에서 ‘나’와 민애란은 같은 날에 부임한 문경국민학교 동료 교사다.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하숙방에 함께 있을 만큼 가깝게 지낸다. 한편 나를 좋아하는 하숙집 처녀 정숙이는 노골적으로 질투한다. 

  나와 애란은 일 년가량 사귀다 헤어진다.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버린 것이다. 애란이가 문경을 떠나는 그날 새벽, 나는 그녀를 배웅하며 ‘나도 문경을 떠날 거야.’ 하고 결심한다. 

  민 선생이 떠난 뒤 정숙이는 내가 구출하지 않았으면 겁탈당할 뻔한 위기를 겪는다. 이를 계기로 나와 정숙이의 인연은 깊어지고, 내가 문경을 떠나는 날 그녀는 아내이듯이 배웅 나오지만 헤어지고 만다.   

 

  <그 여자>는 ‘나’와 정숙이와의 사랑과 이별과 재회에 서술의 무게를 싣는다. 

  내가 서울로 떠난 뒤 정숙이는 겁탈당한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내의 아내가 된다. 나의 아이를 밴 채다.

  몇 년 뒤 나는 우연히 서울 어느 통닭구이 집을 들렀다가 정숙이를 만난다. 정숙이는 여덟 살 남자 아이 동욱이를 키우며 남편과 가게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날 동욱이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눈알을 뙤록인다. 내가 ‘녀석이 나를 많이 닮았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정숙이 남편이 의심하는 표정을 짓는다. 정숙이가 볶이다 못해 동욱이가 나의 아들이라고 실토하자 근육질이 충격으로 급사한다. 과수가 된 정숙이는 김밥 장사와 화장품 보따리 장사를 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수년 뒤 나는 문경에 사는 제자 집에서 정숙이를 다시 만나 지난날을 회상하며 연정을 되살린다.

알고 보니 정숙이는 Y일보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였다.      

 

  <겨울 숲>에서 ‘나’는 헤어진 지 얼마 안 돼 애란을 덕수궁에서 만나지만 그냥 지나친다. 그 후 중년이 되어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고3이 된 딸 정아를 키우며 과수로 살고 있다. 외로움에 지친 애란은 나에게 매달리고, 가정이 있는 나는 갈등을 느낀다. 

  나는 그녀를 피해 일 년가량 영국에 나가 지낸다. 나는 귀국 후에도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정아가 노년이 된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엄마 손 한번 잡아 주세요. 엄마 오래 못 버티세요.”  

  나는 애란을 병실로 문병 간다. 삶의 끝에 누워 있는 그녀 모습을 보고 나는 죄의식을 느낀다. 

  며칠 뒤 임종 소식을 듣고 나는 진혼 미사곡 하나를 튼다. 그제야 나는 이제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빈 둥지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분 말씀을 떠올린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전도서 1 : 2>

 

  <그해 여름>은 국민학생이 주인공이다. 육이오 전후의 좌우 격돌이 소년에게 끼친 상처를 조명한 전쟁소설이다. 

  밤손님(빨치산)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현장을 목격한 소년 용태는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 용태는 폭격 광경만 보아도 폭격기 조종사가 되어 적군을 맹공하는 환각에 빠진다.    

  인민군이 용태네 마을을 덮쳤을 때 용태 어머니와 용태는 반동으로 몰릴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런데도 행군하는 인민군 소년병을 만난 용태는 본능적으로 동족애를 느낀다.   

  두 달 뒤 동네 사람들은 칠구 부대를 맞아 해방감을 만끽한다. 칠구는 후퇴하는 인민군을 뒤쫓는 길이었다. 칠구는 용태네 마을 출신이다. 

  칠구가 이끌고 온 병사 중에는 인민군 포로도 섞여 있었다. 용태가 등굣길에서 만났던 소년병과 용태네 마을을 덮쳤던 인민군들이었다. 

  마을 노인 한 분이 소년병 포로를 가리키며 대뜸 목소리를 높인다. 

  “전쟁이 저 아를 저래 맹근 게야. 저 아는 아문 죄 없어. 망할 놈의 전쟁!”  

  용태는 끌려가는 소년병을 작별하며 속으로 말한다. 

  “형, 걱정 마. 운이 있는 사람은 하늘이 봐준다고 했어. 형은 운이 있을 거야. 착하니까.”  

  칠구 부대가 떠나고, 아군 폭격기가 적진을 향해 돌진하자 용태는 또 조종사가 된 환각에 빠진다.     

 

  <변명>은 고등학교 삼학년 학생과 교장 선생의 충돌을 통해 십 대의 반항과 고뇌를 다룬 성장소설이다. 학생과 교장의 분노 뒤에 웅크리고 있는 동병상련의 트라우마가 소재다. 

  학교 측이 기성회비 미납생들을 시험장에서 내쫓자 학생 하나가 교장 선생에게 조롱 투의 항의문을 보낸다. 분노한 교장은 그 학생을 불호령친다. 

  “학생들의 고혈을 짜는 사이비 교육자는 물러가라? 이런 염장 지르는 말을 어떻게 함부로 하나? 물러갈 놈은 바로 너야! 넌 퇴학이야!” 

  분을 못 이긴 교장은 쓰러진다. 퇴학 당한 학생은 얼마 뒤 복학되고, 교장은 물러난다. 교장을 조롱한 학생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트라우마를 내세워 자기 행동을 스스로 변명한다. 아버지가 밤손님(빨치산)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충격이 교장을 조롱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거다.  

  교장은 훗날 제자에게 일본 강점기에 받은 고문 흔적을 보여주며, 그 후유증으로 걸핏하면 분노하고 또 남을 괴롭혀야 쾌감을 느꼈노라고 털어놓는다. 변명이라기에는 너무도 처연한 그 말을 듣고, 제자는 철없이 행동한 것을 뉘우친다. 

  교장은 제자와 대화를 나누다가 돌연 광기 어린 눈빛을 띠며 치매 증상을 보인다. 제자는 한 가닥 비애를 느끼며 뒤돌아 온다. 

제자는 돌아오는 길에 이런 성경 말씀을 떠올리며 밤손님을 잊기로 마음먹는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노라.” <로마서 12 : 19>

 

3

  어떤 이는 소설가를 언어로 작품을 빚는 장인이라고 했다. 장인의 솜씨와 정신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뜻일 게다. 또 어떤 이는 소설가의 글쓰기를 십자가의 고행에 비유한다. 

  니체는 피로 쓰라고 했다. 그는 피로 쓴 글만 사랑한다고 했다. 피로 쓴 글이어야 읽을 가치가 있다는 거였다. 

  글쓰기를 업으로 택한 작가라면 누가 건성으로 쓰겠는가. 그래서 나는 작가를 존경하다 못해 흠모한다. 소설이든 시든, 평생 글쓰기에 매달려 끊임없이 작품을 빚어내는, 그 흉내 내기 힘든 정신과 열정을 경탄하는 것이다. 

  나 역시 고독과 싸우며 내 나름으로는 공들여 작품을 썼다. 여느 작가들처럼 카페에서도 쓰고, 산길에서도 메모했다. 

  소설에서 언어는 문장으로 나타난다. 주제도 구성도 중요하지만, 서술 요컨대 문장이 나는 소설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서사이든 서정이든, 지문이든 대화든, 길든 짧든, 문장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소설은 읽히게 된다. 그러나 ‘소설 문장’ 쓰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소설이 갖는 언어미학의 속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유야 무엇이건 썼다가 지우고 지웠다가 다시 살리고, 점 하나도 고쳐 찍기 일쑤였다. 작가들이 흔히 그러듯이 나도 문장 하나를 짜내기 위해 불면의 밤을 지새울 때가 적지 않았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소가 여물을 새김질하듯 작가들은 생각을 새김질한다. 나도 가끔, 아니 시도 때도 없이 그래 버릇했었다. 그러나 넘어야 할 벽,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걸 아직 넘지 못한 것 같아 자괴감이 든다. 어쩜 그 벽은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깨뜨려야 하는 껍질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제자가 나에게 말한다. 

  “굳이 나이를 밝힐 필요가 있습니까?”  

  읽는 이에게 잘못된 선입감을 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사람아 나이는 세월이야. 독자들은 세월이 녹아든 작품도 좋아해.” 

  그렇다. 풋김치는 풋김치의 맛이 있고, 묵은지는 묵은지의 맛이 있다. 나는 나의 연륜이 스며든 묵은지찌개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뒤늦게 겨우 소설집 한 권 내고 무슨 넉살이냐 할지 모른다. 옳은 말씀이다. ‘뒤늦게.’ 바로 그 이유, 그러니까 늘그막에 등단한 나에게는 소설 쓰기가 다시없는 낙이면서도 힘겨운 노동이었다. 또 시간과의 경쟁이기도 했다. 나이와의 싸움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멈출 줄 모르는 시간은 나를 줄곧 옥죄어 댔고, 나는 저물녘에 길 떠난 사람처럼 쫓기는 마음이었다. 아무리 쫓겨도 서둘지는 않았고, 서둘 수도 없었다. 거북이걸음으로 쉬엄쉬엄, 멈추지 않고 매일 한 줄이라도 썼다.    

  이런 뒤안길을 거쳐 이 소설집이 나오게 되었지만, 부끄럽게도 미흡한 점이 많아 보인다. 주제든 구성이든, 무엇 하나 만족하지 않다. 행여 어설픈 몰입이 감정의 과잉과 표현의 과장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는지, 작품성은커녕 치명적인 오류는 없는지, 조심스럽기만 하다. 어쨌거나 나는 그동안 지고 있던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은 홀가분한 기분이다. 

 

  소설가에게 자기 작품의 주인공들은 분신이나 다름없는 또 다른 ‘나’다. 톨스토이의 『부활』에 등장하는 네흘류도프와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레빈을 볼 때면, 나는 작가 톨스토이가 변신한 게 아닌가 착각하고는 한다.       

  표현을 바꾸면 소설은 작가의 자화상이다. 소설은 작가의 삶과 영혼의 결정체라는 말이다. 모름지기 작품 속에는 작가의 경험세계와 정신세계가 알게 모르게 녹아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을 통해 독자들에게 비친 내 모습이 과연 어떤 형상일지 적이 궁금하다. 

  소설 속 인간은 영원하다. 명작의 주인공이 특히 그러하다. 일테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렇지 않은가. 굳이 그를 거명한 것은 내가 만난 소설 속 인물 중에서 그가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서다. 몇 번 만났어도 또 만나고 싶은 작중 위인이 나에게는 라스콜리니코프다. 

  내가 창조한 소설 속 인물들도 독자들로부터 오래 사랑받기를 바란다면 과욕일지. 그 과욕을 저어하면서 나는 감히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동안 진통은 겪었어도, 나는 지금 불임이었던 아낙이 마침내 늦둥이 하나를 순산한 심정이다.

 

2021년 늦봄 

김호진

 

<차례>

작가의 말 / 7

 

누이 / 21

먼 귀로 / 25

궁합 / 55

씨 / 117

문경의 새벽 / 143

그 여자 / 173

겨울 숲 / 201

그해 여름 / 227

변명 / 255

 

<저자 소개>

 

김호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안동사범 졸업 뒤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행정대학원을 거쳐 미국 하와이주립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교수와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고려대 정년 퇴임 뒤 단편 <겨울안개>로 『문학과의식』 신인상을 받았다. 그 이래 <산울림>, <아침까치>, <흘러간 강>, <둥지를 떠나간 새>, <궁합>, <변명>을 문학지에 발표했다. 2021년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와 서울강북문협 회장을 맡고 있다.